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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험 설계사로 17년을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이 일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계약을 위해 먼 지역까지 찾아가는 일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고객이 시간을 내주면 저 역시 그만큼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부산에 있는 고객을 만나기 위해 편도 5시간을 운전했습니다. 왕복으로 계산하면 운전만 10시간이 걸리는 일정이었습니다. 그래도 직접 만나 충분히 설명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새벽부터 준비해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부산에 도착해 진행한 미팅은 5분 만에 끝났습니다. 상대방은 제대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제가 왜 그 먼 곳까지 왔는지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계약이 성사되지 않은 것이 속상한 게 아니었습니다. 만나기 어렵다면 미리 이야기할 수도 있었고, 상담할 생각이 없다면 전화로 정중하게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5시간 동안 운전하게 해 놓고 아무렇지 않게 돌려보내는 태도가 황당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도 다시 5시간을 운전해야 했습니다. 그날은 복귀하는 내내 차 안의 음악을 크게 틀었습니다. 음악이라도 크게 듣지 않으면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계속 올라올 것 같았습니다. 운전하면서 한 가지 생각이 분명해졌습니다. 계약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는 태도였습니다. 내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계속 연락하고 관계를 이어갈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에게는 제가 먼저 연락을 끊었습니다. 보험 설계사라고 해서 모든 관계를 붙잡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친한 사람일수록 보험 이야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보험 설계사로 일하면 주변에서는 친한 사람에게 보험을 권하는 일이 가장 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친한 사람일수록 보험 이야기를 꺼내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상품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순간부터 평소의 관계가 고객과 설계사의 관계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저는 친구를 돕는 마음으로 필요한 보장을 설명했지만, 친구는 저를 도와주기 위해 보험에 가입해 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제로 “너 때문에 보험 가입하는 거야”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고맙다는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듣다 보니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보험은 매달 보험료를 내고 오랜 기간 유지해야 하는 금융상품입니다. 저와의 친분 때문에 가입했다면, 보험료가 부담되거나 계약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책임이 모두 저에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보장이 필요한 순간에는 본인이 선택한 보험이 아니라 친구 부탁으로 가입한 보험이라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친구에게 보험을 판매하고 나면 관계에서도 제가 을이 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상대방은 보험에 가입해줌으로써 저를 도와줬다고 생각했고, 저는 계약을 받은 사람이니 계속 미안하고 고마워해야 하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사소한 부탁을 거절하기도 어려웠고, 계약과 상관없는 일까지 신경 써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보험 가입이 누군가에게 베푸는 호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친한 사이일수록 더욱 냉정하게 필요성과 조건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친구라는 이유로 먼저 보험을 권하지 않았습니다. 물어보면 정확히 설명하되, 최종 선택은 반드시 본인이 하도록 했습니다.
보험은 너를 위해 가입하는 것이지 나를 위해 가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험 계약이 끝난 뒤 선물을 요구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계약을 해줬으니 무언가 돌려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계약에 대한 감사의 뜻도 있었고, 관계를 좋게 이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한 번의 선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명절이 되면 선물을 보내야 할 것 같았고, 생일이 되면 또 챙겨야 할 것 같았습니다. 계약을 유지하는 동안 계속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겼습니다.
한 명에게만 선물을 줄 수도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는 보내고 누구에게는 보내지 않으면 서운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약자가 늘어날수록 명절과 생일에 챙겨야 할 사람도 계속 늘어났습니다. 처음에는 감사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선물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의무처럼 느껴졌습니다. 보험의 보장 내용보다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가 더 중요하게 이야기될 때는 제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까지 흔들렸습니다.
보험은 설계사를 위해 가입하는 상품이 아닙니다. 가입자 본인과 가족에게 질병이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경제적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제가 계약을 받았다는 이유로 가입자가 저를 도와줬다고 생각하거나, 제가 계속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보험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저는 고객에게 필요한 보장을 분석하고 계약 이후에도 제대로 관리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해야 했습니다. 선물을 계속 보내는 것이 좋은 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명절과 생일 선물을 일괄적으로 끊었습니다.
대신 보험이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만 가입을 권하고, 가입 후에는 보장 내용을 정확하게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친분 때문에 억지로 계약을 붙잡거나 선물로 관계를 유지하는 일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결정을 내린 뒤부터 저는 사람을 쫓아다니는 설계사가 아니라, 제 설명이 필요한 사람을 제대로 돕는 설계사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